LOVE FICTION - 02
“니 친구 없다메, 이 가시나야.”
색마저 청량하기 짝이 없는 청포도 주스에 꽂힌 스트로우를 입에 문 도운의 눈매가 사납게 치켜 올라 가 있었다. 톡 쏘아 붙이는 말투에도 맞은편에 앉은 희영은 여유롭게 오레오 쉐이크를 휘휘 저을 뿐이었다.
“외롭다고 했지 없다고는 안 했다.”
“뭐어? 밥을 혼자 드세요?”
“어어, 걔는 점심을 아주 마시고 뛰어 나가던데. 공 차러.”
등나무로 촘촘히 짜인 의자 등받이에 한껏 몸을 기대며 다리를 꼬아 앉던 희영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동시에 도운의 한쪽 눈썹도 출렁이다 다시 제 자리를 찾는다. 눈에 띄게 가슴을 부풀렸다 꺼트리며 숨을 고른 도운이 다시 한 번 그녀를 추궁하듯 물었다.
“내가 니 하나뿐인 친구라며.”
“당연하지. 가는 친구는 아이지.”
Just classmate. 방긋, 웃음을 띤 얼굴을 기우뚱 젖히며 양손을 으쓱이는 그녀의 얼굴에 도운은 없던 편두통이 밀려오는 듯 했다. 지끈거리는 미간을 검지로 슥, 슥 문지르는데 제 앞의 아가씨는 잘 닦인 구두 코끝을 흔들며 콧노래까지 불렀다.
“금마는 내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몇 안 되는 남자 중 하나지.”
“공주병.”
“근데 그게 게이라 그런 줄은 오늘 알았네?”
작게 웃음소리가 따라 붙는 희영의 목소리에 도운은 또 한 번 큰 숨을 뱉었다. 양 볼을 홀쭉이 빨아 당겨 포도 주스를 머금자 새콤한 과육이 얼음 알갱이에 섞여 들어 입 안의 열을 식혔다. 그러나 어석이며 씹히는 얼음덩이를 삼켜보아도 시끄러운 속은 진정을 할 줄 몰랐다. 잔뜩 인상을 구기고 주스에 집중하는 도운을 바라보던 희영이 테이블 위로 몸을 기대며 다시 그를 놀려 들었다.
“박성진 금마 오늘 하루 종일 니만 봤다. 아나?”
“뒤통수에 구멍 날 뻔 했던 건 안다.”
“원래 내랑 같이 오붓하게 마주 앉아 밥 먹는 아 아이다, 가.”
“그런 것 치고는 니 너무 다정하게 걔 부르더라? ‘오-진아, 같이 먹을래?’”
“그냥 ‘앉을래?’ 한 마디 물어 봤다. 부풀리지 마라.”
희영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듯 높은 소리를 내던 도운의 코앞으로 쭈욱 편 제 검지를 내민 희영이 짐짓 엄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과장된 이야기에 결벽이 생길 정도로 소문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기에 사소한 부분에서도 민감하게 굴었다-라는 건 아니고. 그저 도운을 놀리기 위함이었다. 희영의 의도대로 도운은 흘기던 눈을 살짝 내려뜨며 순순히 사과를 했다. 희영은 금세 얼굴을 풀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밥 먹다가 체하는 줄 알았자, 진짜로.”
한참이나 질겅이던 스트로우를 뱉어 낸 도운의 투정 섞인 말에 쉐이크를 휘적이던 희영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갔다. 얼마 전 식사시간을 떠 올리자 도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도운은 양 손에 각각 숟가락과 젓가락을 쥐고 제 앞에 놓인 식판을 노려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의 앞에는 제철음식이라는 냉이된장국과 흑미밥, 고기가 들어 간 샐러드 등이 수북이 쌓인 식판이 놓여 있었고, 맞은편에는 희영이 앉아 우아하게 오렌지 주스를 들이켰으며, 바로 옆에는.
“와 안 묵노?”
조금 전까지 도운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던 성진이 앉아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성진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서던 도운과 마주 친 성진은 그 길로 옆 자리에 도운을 앉혀 두고 제 손에 들렸던 식판을 밀어 주었다. 그의 친구로 보이는 소년이 막 내려놓던 식판은 희영에게 쥐어 준 채. 난데없이 식판을 빼앗긴 소년이 항의의 제스처를 취해 보았지만 그는 대답을 구하지 못 하고 발을 구르며 다시 식판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소년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황당한 기색을 보였음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은 채 테이블 위로 팔을 괴고 앉아 도운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킨 성진과, 소년을 향해 샐쭉이 웃음을 보이는 희영의 탓이었다. 아야, 고맙디. 동그랗게 굴러가는 희영의 목소리에 돌아서는 소년의 뒷목이 색을 달리 했다.
“…뭐고?”
그래서 이번엔 도운이 물었다. 의중을 알 수 없어 한껏 얼굴을 찌푸리고 성진을 샅샅이 훑어보려는 도운의 눈길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성진은 담백하기 그지없는 대답을 주었다.
“밥 먹으라고.”
너무 담백해서 주어와 서술어가 모두 생략 된 것이 문제였지만. 도운은 제 앞에 놓인 식판을 다시 성진의 앞으로 밀며 말했다.
“내가 갖다 무께.”
“뭐 하러 귀찮게.”
“맞다. 저 줄 의외로 길다, 운아. 그냥 먹자.”
이미 베이컨이 돌돌 말린 아스파라거스에 젓가락을 찍어 넣던 희영이 성진의 말을 거들었다. 아, 저 가시나가. 한껏 눈에 힘을 주어 흘겨보지만 그녀는 베이컨이 짜다는 불평이나 중얼거렸다. 도운은 눈에 힘을 풀지 않은 채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도 손 있다.”
“안다. 발도 있네.”
“이거 니 거 아이가? 이거 내한테 주면 니는 다시 가지러 가야 하잖아. 네 말마따나 귀찮게.”
“신경 꺼라. 내 알아 한다.”
어느새 식판은 다시 도운의 앞으로 돌아 와 있었다. 성진은 예의 그 무던한 얼굴을 제 손바닥으로 받힌 채 식판을 향해 눈짓 했다. 도운은 도저히 참지 못 해 성진에게 물었다.
“내 내한테 와 이러는데?”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그러나 그 문장의 의미는 단순히 ‘왜 네 점심을 날 주냐.’ 뿐만이 아니라 오전 내의 성진의 행동에 관한 것도 포함 되어 있었다.
*
가벼운 아침 인사 뒤로 수업이 시작 된 이후 도운은 한 순간도 수업에 집중 할 수 없었다. 정말 뒤통수에 구멍이라도 뚫어버릴 기세로 뜨겁게 닿아 오는 시선 때문에. 한 번은 견디다 못 한 도운이 휙, 돌아보았을 때였다.
‘뭐.’
눈이 마주치고도 그는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만 봐라. 니 때문에 하나도 집중 안 된다.’
‘내가 내 눈으로 본다는데, 뭐.’
돌아온 것은 뻔뻔스러운 대꾸였다. 허. 가슴팍에 차오르는 황당함을 숨에 실어 툭 내뱉자 그는 제 턱을 괴고 있던 팔을 바꾸며 까딱까딱 턱짓을 하였다.
‘수업 중이다. 앞에 봐.’
도운은 꺼림직 했지만 때 마침 선생님이 칠판을 두드리는 바람에 별 다른 대꾸를 하지 못 하고 다시 앞을 향해 돌아앉았다. 네가 네 눈으로 날 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네 시선 때문에 내가 신경이 쓰여서 수업에 집중 못 하는 게 문제인 것 같은데..곰곰이 되새기던 도운이 이번엔 노트 귀퉁이를 찢어 쪽지를 적어 내려갔다.
‘너 때문에 집중 안 돼.’
두어 번 접어진 작은 종이를 등 뒤로 던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전 자신이 던진 종이가 날아들었다.
‘나도 너 때문에 집중 안 돼.’
휘적이며 날려 쓴 도운의 글씨 아래에 의외로 단정한 글씨체가 헛소리를 꾸며내고 있었다. 뭐라는 거고, 임마? 도운이 당장이라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다시 노트 귀퉁이를 찢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툭하고 던져내자 이번엔 돌아오기까지 조금의 시간이 더 걸렸다. 옆 자리의 희영이 흥미로운 눈길로 둘을 번갈아 보았지만 딱히 무어라 묻지는 않았다.
‘예뻐서.’
“으악!!”
등 뒤에서 넘어 든 쪽지를 펼쳐내는 순간 도운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조용한 수업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비명소리와 요란스럽게 덜컹이는 책걸상의 소음에 순간 교실 내의 모든 눈동자들이 도운을 향했다.
“어야, 거 뭐고?”
칠판에 알아듣지도 못 할 기다란 수학 공식을 적던 수학 선생이 분필을 든 손으로 안경을 추켜올리며 물었지만 도운은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 해 입술만 뻐끔거리다 한 참 만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끌어내었다.
“..저..죄송합니다..잠시 딴 생각을...좀...”
자꾸 더듬거리려는 입술을 다잡아 말을 마친 도운을 향해 한심함이 가득 묻어나는 한숨을 내 쉰 수학 선생이 손에 들린 분필을 복도를 향해 세워 들었다.
“아따 마, 솔직해서 좋네. 나머지는 나가서 해보까?”
잔뜩 열이 올라 후끈 거리는 귓바퀴를 문지르며 복도로 나가는 도운의 등 뒤로 성진의 목울대가 울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
이번에도 성진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도운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새까만 눈동자로 도운의 머리칼 끝부터 시작 해 그를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밀도가 촘촘히 쌓여 도무지 그 속을 볼 수가 없을 것 같은 성진의 시선이 여유롭게 도운을 탐색했다. 그 동안에도 도운은 고집스레 제 입술을 꾸욱 다물고 성진을 흘겨 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 글씨체만큼 단정한 성진의 입매가 열리는 순간, 도운은 온 얼굴의 근육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예뻐서.”
잔뜩 물음표가 채워 진 머리통을 설레설레 내저으며 그들을 몰아내려던 도운의 눈앞으로 성진의 손이 다가왔다. 그는 단순히 손을 내밀어 도운의 얼굴 위를 덧그리듯 움직였다. 손길은 닿지 않았다. 성진의 손이 아주 얇은 간격을 사이에 두고 도운의 눈과 코, 뺨과 입술을 지나 턱까지 그려내는 동안 도운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니같이 이쁜 아는 처음 봤다.”
손을 거둔 성진은 그 한 마디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채 자리를 떴다. 어슬렁거리는 듯 한 걸음으로 식당을 나서는 그의 그림자까지 사라진 뒤에도 그대로 굳어 있던 도운이 천천히 희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온 얼굴이 풀려 멍한 표정을 그려 낸 도운의 입술이 꼭 목각인형 같은 모양새로 움직였다.
“점마 뭔데?”
그의 물음에 샐러드에 들어 있던 래디쉬를 골라내던 희영이 어깨를 들썩였다.
“게이, 혹은 미친놈?”
그녀의 고운 치아가 양상추를 깨무는 소리가 청량하게 번졌다. 아사삭.
*
희영은 시에서 장학생들을 위해 생활비도 지원이 되기에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지만 도운은 굳이 새로운 일자리를 구했다. 생활비라는 명목으로 주어지는 금액으로는 빠듯했기 때문이었다. 저녁 시간대에는 미성년자를 고용하지 않는 편의점 대신 도운은 예전에도 잠시 일했던 한적한 테이크아웃 커피 점에 파트타임을 구했다. 제법 성실하게 일했던 도운을 기억한 사장은 그 자리에서 도운을 채용 해 주었다.
회사원들이 퇴근한 후의 시간부터 자정까지만 일을 하면 되는 탓에 일은 여유로웠다. 앞 타임의 점원 누나와 교대를 하고 노란 에이프런을 두른 채 손님들이 주문을 하는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있으려니 잠이 쏟아졌다. 첫 등교가 워낙 파란만장 했어야지. 제 오늘을 되짚어 보던 도운이 고개를 내둘렀다. 성진은 오후 시간 내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아르바이트를 오기 전 들렸던 카페에서 희영은 굳이 그의 행방을 알려주었다.
‘걔 그래보여도 이름 있는 재벌 집 막내다. 오늘 아마 가 큰 형 생일인가 뭔가 그렇다던데? 아마 거기 끌려갔겠지. 있는 집들은 그런 행사에 돈 자랑, 자식 자랑하는 걸 취미로 삼거든.’
해마다 제 생일이면 바보 같은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미인대회 참가자 마냥 하루 종일 웃느라 얼굴에 쥐가 나노라 욕지거리를 하던 그녀는 성진의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혀를 찼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그 얼굴에 봄 꽃 같은 생기를 띄며 말했다.
‘잘 해 보면 어떤데? 니 장래희망, 졸부 집 막내아들 첩 질이잖아.’
‘미안한데, 나도 취향은 있거든? 난 게이만 만난다.’
‘니보고 이삐다 카는 거 보면 게이지, 뭐.’
‘그냥 단순히 미친놈일거라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아줄래?’
혀를 빼어 물고 샐샐 웃음을 터트리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처음 도운이 제 성 정체성을 고백 했을 때도 꼭 그런 얼굴로 웃었다.
[너랑 한 남자를 두고 싸우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구김 없이 자란 그녀는 매사에 낙천적이었다. 도운은 희영의 그런 점이 좋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제 생각에 저는 너무 걱정이 많았다.
등 뒤에서 솔솔 풍겨오는 커피 냄새에 잠시 코를 킁킁거리던 도운이 창틀 위로 팔을 겹쳐 두며 그 위로 뺨을 기대었다. 이제 겨우 하루 등교 했을 뿐인데, 12시간이 넘도록 일을 하던 때보다 어쩐지 더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장학금을 계속 받기 위해서는 앞으로 아르바이트 틈틈이 시간을 쪼개어 공부도 해야 했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당장 내일 숙제마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입학시험을 준비하며 급하게 벼락치기 공부를 하긴 했지만, 확실히 1년여를 쉬었던 탓에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지지는 않을까 노파심이 드는 것이었다. 도운의 입술 새에서 흘러 나간 한숨이 창밖의 거리로 굴러 떨어졌다.
한참이나 눈을 껌뻑이며 걱정을 헤아리던 도운은 뻐근하게 뭉친 목 언저리가 아파왔다. 엎드렸던 몸을 풀어 고개를 숙이고 뒷목을 주무르는데, 그런 자신의 손등 위로 따뜻하고 단단한 손바닥이 겹쳐 왔다.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려 했지만 도운의 손을 감싼 손바닥이 그의 목을 꾸욱 주물렀다.
“이제 편의점은 안 가나?”
낯익은 아니, 낯이 익을 수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성진의 목소리에 도운은 입을 꾸욱 다물었다. 얘는 뭐하는 놈인데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 나? 도은이 침묵을 지키는 와중에도 성진은 도운의 손을 이용 해 그의 목을 부드럽게 만졌다. 몇 번이나 도운의 목을 만져주던 성진의 손길이 떨어지자 그제야 도운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들고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교복이 아닌 수트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학교 다니니까 아르바이트 바꿨다.”
도운의 대답에 성진는 이해가 안 되는 듯 잠시 눈썹을 그려 모았다가 놓았다.
“아르바이트...그거 꼭 해야 하는 거가?”
이번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도운의 쪽이었다.
“그래야 돈을 벌지.”
창틀을 사이에 둔 두 사람 사이로 잠시 정적이 머물렀다. 멀뚱히 서로의 얼굴만 살피며 조금이라도 ‘이해’라는 것을 해 보려 애 쓰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성진이었다.
“돈이 필요해?”
너무도 당연한 말을 조금도 당연하지 않은 어조로 물어 오는 성진에 도운은 헛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 봐라. 임마 이거 게이가 아니라 단순한 미친놈이라니까? 도운은 당장이라도 이 모습을 희영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지금 그녀는 제 아버지의 가족 동반 디너 모임에 끌려 간 참이었다. 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억지 웃음을 지었다.
“돈 없으면 학교는 어떻게 다니고, 밥은 어떻게 먹겠어요, 손님. 주문하실 거 아니면 좀 비켜 주실래요? 진짜 손님들 하나도 못 오겠네.”
성진은 다시 입을 다물고 도운의 머리맡에 붙은 메뉴판을 눈으로 훑었다. 그러나 그것은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던 듯 메뉴판에는 있지도 않은 것을 주문했다.
“콜라.”
“옆 모퉁이 돌아서 200m쯤 더 가면 편의점 있다. 거기 가서 사 먹어라.”
“그럼 아무거나 도.”
아 나, 이 새끼가....저도 모르게 주먹을 꽈악 틀어 쥔 도운이 눈을 번뜩이며 성진을 노려보았다. 성진은 태연하게 수트 주머니에 들어 있던 제 지갑을 꺼내어 들고 있었고, 도운은 잠시 뒤를 돌아 마음을 달래려 애 썼다.
나는 을이고, 사장님은 갑이고, 손님은 슈퍼 갑...인데 이 새끼는 왜 볼 때마다 나한테 갑 질이야, 갑 질이?
물론, 그 것은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갔다. 차라리 저 손에 뭐든 쥐어주고 얼른 보내자 싶어 진 도운은 미리 뽑아 두었던 드립 커피를 종이컵에 부어 뚜껑을 닫은 뒤 성진의 앞에 내밀었다. 그에 느릿한 손길로 지갑 속에서 지폐를 꺼내던 성진의 손길에 잠시 머뭇거림이 묻어났다.
“아무거나 달라며.”
퉁명스런 도운의 말에 성진은 빳빳한 지폐 한 장을 꺼내어 내민다. 철컹이며 열리는 캐시박스에서 잔돈을 챙겨 내밀자 성진은 잔돈을 쥔 도운의 손만 멀뚱히 내려 보았다. 도운이 동전을 쥔 손을 흔들자 짤랑이는 소리가 창틀 위를 굴렀다.
“뭐하노, 안 받고.”
그제야 수트 주머니에 들어 가 있던 성진의 손이 도운의 앞으로 내밀어 졌다. 그리고 그 손은 성진의 손바닥 위로 잔돈을 털어 내려던 도운의 손을 잡아 쥐었다. 성진은 도운의 손을 쥔 채 찬찬히 그의 손을 들여 보았다.
“니는 손도 예쁘네.”
언제나처럼 담백한 말투의 멘트성 짙은 문장이었다. 잠시 당황한 도운이 손을 움츠리려 했지만 성진의 손이 어찌나 단단히 쥐었던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멘트는 가시나들에게나 해라.”
“니만치 예쁜 가시나가 없네.”
“아이고야. 우야노? 내는 별로 안 기쁜데?”
여전히 그에게 손이 잡힌 채 도운은 일부러 과장스런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성진은 그제야 도운의 손에 두었던 시선을 그의 얼굴로 당겨 올렸다.
“그래도 우짜겠노. 니가 예쁜 건 사실인데.”
와, 대박. 나 지금 등에 소름 돋았어. 도운은 턱 하니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하고 기겁한 얼굴을 해 보이고 말았다. 절로 뒤로 물러 세워진 몸을 주춤거리며 손을 빼려하자 성진은 가볍게 그의 손을 놓아 주었다. 도운은 재빨리 손 안의 잔돈을 폭이 긴 창틀 위에 올려 두고는 제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런 도운의 모습에 건조하던 성진의 얼굴 위로 부스스, 웃음이 번졌다.
“니는 그런 천치 같은 앞치마를 둘러도 이쁘노?”
송아지 눈깔처럼 큼지막한 눈매가 동그랗게 말아졌다. 소리도 나지 않은 눈웃음을 띈 성진이 여전히 경계 중인 도운을 두고 등을 돌렸다. 간다. 짧은 인사는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기만 해, 조금 전 허튼 멘트를 남긴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창틀엔 아직 따뜻한 기운이 가득한 커피와 도운의 손 안에 담겼던 잔돈이 남았다.
“야! 커피 안 가져 가나!!”
도운의 부름에 겨우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성진의 발이 멈춰 섰다. 그는 고개만 빠끔히 돌려 말했다.
“내 커피 안 묵는다. 써서.”
성진의 새까만 눈이 잠시 커피 잔에 닿았다 거두어졌다. 타박이는 걸음은 보통 사람보다 빠른 편이었고, 그의 뒷모습이 온전히 사라진 뒤 이제는 미지근해 질 지경의 커피 잔을 내려 보던 도운이 중얼거렸다.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거네, 저 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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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님 일 안 해요?
A. 이제 하러 갈 거에요.....
헤헷